기획 · 특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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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갬성'으로 이끄는 소통 시정[시사픽] 1년전 국민의힘 최민호 후보는 기적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 시정 8년, 갑과 을로 나눠진 국회의원은 모두 민주당 소속이고 시의회는 18명의 시의원 중 국민의힘 소속의원은 단 1명. 그마저도 비례 출신이다. 민주당은 세종시가 출범한 이후 모든 선거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특히 4년전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싹쓸이였다. 2년후 펼쳐진 총선 역시 마찬가지. 지방선거 직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격차는 비록 7.8%로 줄었지만 야당 대선후보의 승리였다. 지난 대선에서 충청권은 천안서북, 청주청원, 아산과 진천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보수가 승리했지만 세종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찌보면 계란으로 바위치는 싸움에서 단기필마로 나선 최민호 후보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저력을 보였다. 조직, 자금, 경험, 현직 프리미엄 등 모든 면에서 밀렸던 ‘다윗’ 최민호가 골리앗 전직시장을 상대한 무기는 다름 아닌 갬성으로 무장한 진정성이었다. 최 후보는 선거기간 중 색소폰 연주로 시민들에게 다가갔다. 과거 보수후보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시민들과 허심탄회하게 어우러지는 그를 시민들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결코 민주당과 정면대결을 하지 않았다. 세를 과시하는 상대방을 인정했다. 다만 그는 철저하게 발로 뛰며 바닥을 다졌다. 그리고 외곽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서서히 다가섰다. 시민들의 하소연을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며 자신이 세종시와 세종시민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숙지했다. 마침내 그는 세종시가 출범한 이래 최초로 보수출신 시장으로 당선됐다. 비록 기지개를 켜긴 했지만 갈 길은 멀었다. 하지만 그는 후보시절 발품을 팔며 만났던 이들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오랜 시간 관료생활을 한 행정가이지만 정치인으로서 경험도 적지 않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기초를 다질 때 그는 행정자치부 자치분권추진기획단장으로 지방자치를 연구하고 실무를 직접 지휘했다. 세종시가 출범하기 이전부터 새로 만들어질 행정수도의 밑그림을 그렸다. 비록 여러 차례 도전이 시행착오와 시기가 맞지 않아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꿈을 펼칠 시기가 도래했다. 그가 시장으로 취임하고 1년이 됐다. 그가 조바심을 내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종시를 위한 로드맵을 차례차례 시행하고 있다. 그는 전직 시장이 미처 마무리하지 않은 사업을 비롯 지속가능한 사업들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시의 추동력 낭비를 최소화하며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먼저 세종시의 체질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다. 세종시 속의 행복도시와 행복도시 밖의 세종시를 하나로 묶으려 힘을 쓰고 있다. 행복도시에 대한 개발을 정부가 주도하는 동안 행복도시 이외의 지역에 행정력을 집중해 두 지역의 문화적 격차를 줄여 나가는 것. 신규 입주민과 원주민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 지향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세종시의 정체성을 찾아 창조, 개척, 절의로 대변되는 시의 상징성을 시민정신이자 문화운동으로 지향하려하고 있다. 세종대왕과 시대를 같이했던 인물들인 김종서 장군과 사육신 성삼문이 상징하는 정신과 사상 그리고 그들의 행적을 연구해 세종시의 정체성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지역민과의 대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시장후보 시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약속이자 초심을 잊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다.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주민들과 함께하는 ‘1박2일’이 그것이다. 주민들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그들의 바람을 시정에 반영하고 시의 시책을 시장이 직접 설명하는 소통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대화를 통해 마을의 특성을 살린 개발을 지원하고 발전 방향을 새로운 시책에 반영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최 시장의 행보는 마을에서 마을,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외곽지역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 이를 공간화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혜의 자연 환경이나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세종시의 현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이를 새로운 관광산업으로 변모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스쳐가는 관광산업 문제점을 개선해 단순 자연이나 풍광 관람 혹은 역사문화재 관람 형식에서 벗어나 체험 및 체류형 관광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해 시행된 ‘낙화놀이’가 있다. 영평사와 부강면 등곡리 마을에서 시행하던 낙화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놀이로 향후 세종의 전통축제로 성장이 기대된다. 또 세종대왕의 치료에 도움을 줬다고 전해지는 ‘전의초수’ 역시 역사성을 조명해 역사와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이 예상되고 있다. 지역의 특색을 살린 관광 콘텐츠를 통한 소비 촉진과 재방문을 유도할 수 있는 근본적인 관광화 전략 수립을 통해 세종시를 미래형 관광도시로 조성코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한 그의 발걸음이 다다를 곳이 ‘정원도시 세종’이다. ‘가볼만한 도시 세종’, 도시와 숲이 어우러진 도심, 강과 습지 그리고 도시가 만나는 문명과 자연의 조화, 지역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목표로 국제정원박람회를 계획해 이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중앙 정부와의 소통에도 힘쓰고 있다. 그의 행보에 여야가 따로 없다. 세종시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고 도움을 청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현안인 지방법원, 행정법원, 국회 세종의사당, 대통령 집무실 유치다. 또 최근에는 ‘행정수도’의 헌법 삽입을 위한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1440분, 아니 8만6400초로 나눠 쓰며 1분 1초라도 시와 시민들을 위해 노력하고 고심하는 그는 이제 새로운 세종시를 위해 힘찬 보폭을 내딛고 있다. 한편 최민호시장은 얼마 전 이춘희 전시장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이 시장과 같이 일했던 실‧국장들 모두와 함께 전주로 가서 조문을 했다. 이것이 그의 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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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진짜로 온겨, 우리 시장[시사픽]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출발해 금강기슭을 지나 칠흑같은 어둠속에 찾은 마을. 그곳은 최민호 세종시장이 민생탐방의 첫 출발지인 부강면 등곡3리다. 이 마을은 1970년대 충광농원이 들어서며 한센인들이 집단으로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어둠에 묻혀 있지만 등곡이란 마을 이름처럼 등짐을 지고 가자면 등골리 휠 정도로 힘들다고 하지만 그리 산세가 험해 보이지는 않는 곳이다. 동쪽으로 노고봉과 뒤편의 화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나지막한 구릉과 금강을 낀 들판이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존들(좋은들)처럼 전형적인 우리네 농촌이다. 최 시장은 등곡3리에서 1시간 가량 주민들과 대화를 나눈 뒤 고개 넘어 숙박 예정지인 등곡1리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인 최민호 세종시장의 현장소통 프로젝트인 ‘시장과 함께하는 1박2일’ 첫 일정이 시작된 셈이다. 최 시장은 "후보시절 ‘옛날 우리동네 마을회관에서 이야기 들어주고 자고 간 그때 그 양반이다’라며 알아 봐 준 어르신들이 고맙고 뜻깊었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구상했다고 한다. 뜻밖의 손님을 대하는 마을 어르신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말처럼 마을회관에 모인 동네 주민들은 "진짜 오네 그랴, 설마했는디”라는 말로 시장의 방문이 반갑기도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역했다. 한 마을 어르신은 ‘시장님이 온다고 했지만 진짜 와서 주무시고 가신다고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 어르신은 "이웃 동네 경로당을 찾아온 시장이 하루 종일 이야기 한 것은 물론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 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설마 우리 마을에도 오실 줄은 몰랐다”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등곡1리 동네 어귀에서부터 신기한 불꽃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낙화라고 불리는 불꽃으로 언제부터인지 이곳 등곡1리에서 행해지는 민속놀이라고 한다. 예전에 본적이 있는 경남 함안 낙화놀이의 축소판 같았다. 등곡1리에 도착한 최 시장은 "2012년도 시장 후보시절 이불을 싸들고 동네를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고 마을회관에서 잤다”며 "그 때 주민들과 만남이 뜻깊었고 의미가 있어 초심으로 시장이 되면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제야 지킨다”고 말했다. ‘아마 좀 더 일찍 시장이 되었다면 마을 주민들과 벌써 마주쳤을 것이고 그러면 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최 시장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마을 주민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주민들의 환대속에 마을회관에 자리한 최 시장은 도착하며 본 낙화이야기로 주민들과 대화의 문을 열었다. 낙화에 대한 최 시장의 관심과 지식은 놀라울 정도였다. 고려시대(?)부터 불교의 연등과 관련되어 전래된 이 놀이는 조선시대에는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들의 고급스런 유희였다. 오늘날 큰 행사의 개폐회식에 등장하는 불꽃놀이처럼. 이야기가 발전되어 낙화놀이를 세종의 고유 민속놀이로 발전시키는 방안까지 오가며 본격적인 마을 주민들의 민원을 비롯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주민들의 민원속에 최 시장의 고충과 당부도 이어졌다. ‘정원도시 세종’을 만들기 위한 최 시장과 세종시의 노력에 주민들도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을회관에서 잠을 청하는 최 시장과 일행들을 뒤로 하고 나서는 등곡리의 차가운 밤공기가 마냥 차갑지만 않게 느껴지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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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세종시 훈훈한 세밑 “공양 먼저 하세요”[시사픽] 2023년 계묘년을 맞는 첫날 세종시 연서면 소재 보림사에서는 세종에서는 처음으로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열렸다. 세종에서 첫 제야의 종 타종이라는 기대감에 행사 6시간여 앞서 보림사를 향했다. 사찰에서의 행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도착했다. 보림사는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포근하니 들어앉은 도량이었다. 사찰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만난 이가 "공양 안하셨으면 공양부터 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보편적으로 "어디서(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건네는 첫 인사말인 것으로만 여겼었는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찰이라는 도량을 접한 경험도 크지 않은 탓이기도 하려니와 저녁시간이려니 생각하며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쁜 걸음들이 오가고 있었다, 무대 준비를 위한 걸음, 추위를 녹여 줄 난로불 점검에 따끈한 커피물 준비, 안전한 행사를 위한 동선 준비, 일일이 시민들이 자리할 의자를 닦는 등등으로 각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너나없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이는 없고 "공양 하세요”라고 한다. 공양간 문을 열고 깔끔하고 널찍한 방에 들어섰지만 상이 차려져 있거나 식사 중인 사람은 없었다. "밥 먹을 수 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네, 드세요”라고 한다. 잘 지어진 찰진 밥과 뜨끈한 미역국이 차려졌다. 동치미에 총각김치, 무생채·시금치무침, 된장 등 맛깔나고 정갈한 음식들이 놓였다. 단 숨에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 먹었다. 설거지마저 끝낸 시간에 밥을 찾는 나그네가 반가울리 없을 것이건만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반찬에 미안해하며 편히 식사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밥을 먹다가 문뜩 주방 싱크대에 붙여놓은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구마는 몇 시에 찌고, 어묵국은 몇 시에 안치고, 육수는 몇 시에 준비하고 커피물은 어떻게, 찐빵은, 가래떡은... 등등. 넉넉한 나눔을 위한 일정이었다. "준비하시느라 힘 드시죠? 어디서 왔냐고 묻기 전에 공양부터 하세요라고 하더라. 놀랐다”라고 했더니 "절집은 공양이 후하지요. 동짓날에도 팥죽을 쑤어서 나눴어요, 이번 행사에 일주일은 준비한 것 같아요”라며 더 먹을 것을 권한다. 타종 행사후 참여한 시민들과 함께 떡국을 권하며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는 넉넉함이 묻어난다. 계묘년은 훈훈한 세종시에서 느끼는 인정 덕에 복과 행운이 넘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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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②] 美 헌츠빌부터 몽골까지… ‘논산 도약’ 국제협력망 확대[시사픽]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 출장길에서 돌아온 백성현 논산시장이 곧장 향한 곳은 몽골 날라이흐구(區)였다. 헌츠빌에서 군수산업의 미래 발전 방향과 비전을 밝혔다면 몽골에서는 지역사회에 놓인 현안에 초점을 맞추고 해결방안을 구체화하는 데 주력했다. 백 시장은 몽골 현지에서 정치인, 행정가는 물론 재계, 학계 인사 등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머리를 맞대고 지역농업의 위기 극복 방안을 모색했으며 외자 유치와 기업인 교역 활성화에 힘쓰며 길어진 경기불황의 탈출구를 찾는 모습이었다. 날라이흐구 관계자들로부터의 환대 속에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한 백 시장의 첫 일정은 아마르사이항 사인보양 부총리와의 차담이었다. 사인보양 부총리는 논산시 출장단의 몽골행 소식을 접하고 일행 모두를 국회로 초대해 환담을 나눴다. 사인보양 부총리는 향후 논산시와의 우호적 교류를 기대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백 시장 역시 예우에 화답하며 논산이 지닌 국제적 비전을 소개했으며, 아울러 대표 농특산물과 지역기업 홍보 등에 열을 올리는 등 친선교류 의향과 메시지를 전했다. 백 시장은 이어서 날라이흐구청을 방문, 논산시-날라이흐구 간 ‘외국인 계절근로자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속화된 농촌인력난과 인건비 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로 시야로 넓혀 온 논산시는 날라이흐구와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인력 수급에 숨통을 틔우게 됐다. 협약에 따라 논산시와 날라이흐구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모집ㆍ선정ㆍ교육ㆍ파견 등의 과정에 힘을 모으게 되며, 시는 지역 농가에 우수한 인력을 보내 ‘일손 부족’이라는 급한 불을 끄는 것에 더해 전반적인 생산력 증대까지 바라본다는 계획이다. 사흘째 일정에서는 논산 기업의 해외 판로탐색과 투자활동에 활력을 더하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논산시와 몽골생명과학대학교, 세계한인무역협회(이하 월드옥타)가 3자 간 ‘경제협력 업무 협약’을 맺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행정ㆍ교육ㆍ수출입에 걸친 다각적 실무 추진에 나선다. 또한 논산 기업인 ㈜성은특수콘크리트를 포함해 난딘브라더스 그룹, 몽골생명과학대학교, 월드옥타 논산지회가 ‘한국-몽골 컨소시엄 합착 추진’에 뜻을 모았다. 각 주체들은 몽골의 도시재생과 환경개선을 도모하고자 맨홀ㆍ배관ㆍ오폐수관로 제조 및 생산, 도시폐수 수질정화 등에 가진 역량을 집중할 예정이다. 이와 같은 협약들은 지난 10월 논산에서 열린 ‘월드옥타 수출상담회’와 맞닿아 있다. 백 시장은 당시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찾은 월드옥타 회원을 논산으로 초청, 지역 기업인과의 수출상담 자리를 마련해 975만 달러의 수출 양해각서 체결이라는 거대한 성과를 이룬 바 있다. 이후 시는 월드옥타, 지역기업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후속 계약을 성사시키고자 투자처를 부지런히 물색했고, 몽골생명과학대학과 난딘브라더스 그룹이라는 글로벌 파트너를 만나 상호 간 실익 증대를 약속하게 됐다. 몽골생명과학대학은 유수의 국립대학으로, 수출협력단을 구성해 논산기업의 판로 개척에 힘을 보태며 농업기술 교육과 관련한 인재 교류에도 기여한다는 방침이다. 난딘브라더스 그룹은 몽골 현지의 건설사로 국제적 공조를 발판 삼아 기업 성장을 이뤄내고자 이번 컨소시엄에 손을 내밀었다. 농특산물을 효율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운송망도 넓어졌다. 몽골의 항공운송 기업인 제트캡과 몽골생명과학대학이 물류특송 항공화물 운송지원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으며, 논산시는 이 협력망을 적극 활용해 지역 생산품 수출길 확장에 기폭제로 삼는다는 목표다. 백성현 논산시장은 "민선 8기 출범 이후 꾸준히 이어온 국제적 공조 체계 구축 노력이 미국 그리고 몽골에서도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제 위기 속에 지친 농업인과 기업인의 살길을 찾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이 요구되는 만큼 첨단농기술과 기업활동 촉진 중심의 정책대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이어 "반복ㆍ답습하는 행정으로는 시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고, 미래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며 "시야를 확장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촘촘히 다지고, 산업의 혁신을 추구하며 지역이 지닌 기존의 가치를 다시 바라볼 때 논산의 부흥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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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①] 美 헌츠빌부터 몽골까지… ‘논산 도약’ 국제협력망 확대[시사픽] 아흐레간의 미국-몽골 출장을 수행하고 돌아온 백성현 논산시장이 "시민행복 논산을 만들고자 천명했던 군수산업 메카로의 발전, 생명산업인 농업의 진흥, 기업하기 좋은 논산 조성 등의 미래비전을 또렷하게 응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백 시장은 논산시 발전 방향을 고도화하고 지역경제를 둘러싼 각종 현안의 해결점을 모색하고자 지난 13일 애틀랜타 공항으로 출국, 미 앨라배마주 헌츠빌시에 이어 몽골 울란바토르 날라이흐구 등을 방문했다. 백 시장은 인구감소로 인해 소멸의 위기에 처한 논산에 ‘부흥의 분기점’을 만들고 미래 살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친화적 지역 특성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피력해 온 바 있다. 이에 취임 이후 첫 해외출장의 목적지를 앨라배마주 헌츠빌로 설정했다. 헌츠빌은 미 대륙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 약 22만에, 면적은 논산과 유사하다. 과거 건초, 목화, 옥수수, 담배 등을 주로 생산하는 농경도시였으나 20세기 중반 로켓, 미사일 연구 관련 각종 산업시설·기관이 들어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방·군수산업 도시로 도약했다. 백 시장은 이곳에서 토미 배틀 헌츠빌 시장을 만나 논산시-헌츠빌시 간 친선교류 추진의향서에 합의를 이뤄냈다. 시는 이번 합의를 바탕으로 교류 범위를 확장시켜 군수산업 도시 발전에 필요한 실무적 공조를 도모한다는 방침이다. 전 세계 항공우주 및 방위 산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대도시와의 교류 약속은 전에 없던 사례로 군수산업 도시로의 발전 방향성을 꾸준히 타진해 온 백 시장의 노력과 수완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백 시장은 세계 굴지의 자동차 부품 기업 ‘효성USA’, 헌츠빌 군수산업의 핵심 산업 인프라인 ‘레드스톤 아스날’, 헌츠빌 상공회의소 등 재계 인사들과도 면담의 자리를 가지며 거시경제의 흐름과 군수산업의 미래 지향점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인적자원을 어떻게 발굴하고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출장 일정에 담겨 있었다. 백 시장은 3일차 출장 계획 대부분을 교육기관 방문에 집중시켰다. 미국 내 유일한 첨단기술 공학 특화 고등학교인 ‘앨라배마 첨단기술 고등학교’를 찾아 사이버 기술 및 엔지니어링 분야 육성 정책을 꼼꼼히 시찰했다. 또한 ‘앨라배마 A&M 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겨 농업생명자연과학대학, 경영행정대학 등을 차례로 방문, 학장 이하 교수진을 만나 바이오식품산업·신농업기술 관련 주된 학계 이슈를 수렴했으며 글로벌 인재 교류 프로그램 실천 방안에도 지혜를 모았다. 북앨라배마주 한인사회와의 소통 일정도 우호 증진의 의미를 더했다. 남다른 고국 사랑을 내비친 한인회원들은 논산시 관계자들을 환대하며 향후 논산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 일정 막바지에 백 시장과 간담회 시간을 가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 역시 ‘국방친화 도시’ 논산의 발돋움을 성원했다. 백 시장은 "세계를 호령하는 군수산업 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며 "헌츠빌시를 비롯해 상호 협력을 약속한 여러 주체들이 논산의 미래 발전에의 든든한 아군이자 인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요한 것은 해외 사례를 단순히 벤치마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가 가진 여건과 상황에 비추어 구상한 맞춤형 혁신안을 실현해내는 일”이라며 "논산을 우수한 투자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군수산업체는 물론 산업발달의 밀알이 될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관들과 합심해 도시에 실익을 가져다줄 산업혁신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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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념관 위치는 역사‧상징‧정체성을 우선해야 ➅[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기념관은 설립목표가 뚜렷하며, 특별히 선별된 형태의 기억을 미래세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는 공간이다. 특히 국난을 맞거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공간인 기념관은 역사성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가미한 공간이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일본의 국정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면서 민족적, 정치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설립된 독립기념관(1987)은 천안 흑성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인근에 3.1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관순 열사 관련 유적들이 산재했던 것이 선정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의 독립기념관보다 1년 늦게 문을 연 프랑스의 캉 기념관(Mémorial de Caen)은 노르망디 레지옹 칼바도스 데파르트망의 중세도시 캉에 위치해 있다.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지의 전쟁들과 관계된 문헌, 사진, 유물, 서적, 영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보여주는 가상 영화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독특한 예술품들이 인상적이다. 다른 전쟁 기념관들이 주로 연합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는 전시를 하는데 반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물질적·정신적 피해와 수많은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는 내용의 전시회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 기념관(Mémorial pour la Paix)’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치 치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반성과 희생자 추모를 위해 설립된 베를린 국립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아 2005년 5월 10일 공식 오픈했다. 이 기념관에는 나치 하의 독일이 유대인들을 살해했던 것 등에 대한 각종 자료가 보관돼 있다. ‘살해당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이 기념관은 최고 4.7m인 다양한 높이의 회색 콘크리트 기둥 2711개로 이루어져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기둥들의 조합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의 시신이 안치된 묘비가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기념관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부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집무실 및 지하벙커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이 냉전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다. 이처럼 기념관들이 들어선 지역들은 3.1만세운동 핵심인물, 2차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되는 노르망디 상륙, 그리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집무실 등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사람들이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려 한 ‘기억’을 상징화하고 그것을 ‘기념’함으로써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충남은 대한민국과 운명을 같이 같이하며 격동의 세월을 지내왔다. 특히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며 국난을 당해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을 이루어낸 지역이다.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대한제국말 일제 침략기에 충남에서 의병이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남의 의병들에 대한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상징성이 도드라진 충남에 개인기념관이자 사우인 수당기념관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의병기념관은 없다. 이제 범 도민의 의지를 담아 충남의병기념관을 설립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충남도는 의병이 지닌 의미와 역사성, 충남의 정체성, 그리고 지역의 상징성을 살릴 수 있는 충남의병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 최근 충남의병기념관 건립 위치를 놓고 지역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자칫 국난을 당해 지역과 신분과 학파를 떠나 하나로 뭉쳐 자신을 희생한 무명의 의병들에게 무엇이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충남도는 충남의병을 상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역사성을 살릴 수 있는 지역에 의병기념관이 들어서야 한다는 도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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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지역의 역사적 의병 기억 되살리고 미래세대에 물려줄 공간 필요 ➄[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➀)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➁)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➂)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충남에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창의 한지 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을미창의(1895년)로부터 127년, 병오의진(1906년)이 펼쳐진 해로부터 116년이 흘렀으며 충남 각지에서 의병들이 해외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이어간지도 112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선열들이 피흘려 지키려 했던 파편들을 대부분 역사교과서를 통해 접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아직까지 의롭게 일어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얼마 전 개최됐던 내포문화진흥포럼에서 발표됐던 자료에 따르면 독립유공자가 전체 17,285명으로 출신지역별로 분포로 북한 및 해외유공자 6019명을 제외하면 11,266명이 남한 내에서 활동했다.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의병은 3.1운동(5,991명)과 해외운동(3,564명) 다음으로 많은 2709명(15.67%)이며 전국 독립 관련 70개 기념관 가운데 의병 관련 기념관은 8개(11.43%)로 집계됐다. 이들 8개 기념관도 제천과 청송을 제외하면 나머지 6곳은 개인기념관에 불과하다. 심지어 충남에는 이 같은 기념관조차 단 한곳도 없다. 예산에 수당 이남규 선생의 기념관이 있으나 의병기념관보다는 독립운동가 개인기념관으로 분류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을미의병과 병오의병은 우리 의병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특히 병오의병은 이후 발생한 정미의병의 효시가 되는 사건이자 의병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규모가 컸던 투쟁의 역사이다. 현재 국내 기념관 70곳 가운데 52개소가 개인기념관이다. 그동안 기념관은 지역단위나 중앙의 사건 혹은 대주제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주로 개인 활동을 위주로 설립됐다. 이런 이유로 의병기념관 역시 몇몇 의병장들을 부각시킨 기념관이 대부분이다. 지역을 단위로 설립된 제천이나 청송 의병기념관도 의병장인 이강년과 유인석, 허위 등 지역의병장과 결합된 기념관이다. 앞서 기획 4편 ➁와 ➂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의병은 의병장을 중심으로 거의를 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이름 없는 인물들이 충절의 정신으로 일어난 자발적 거병이다. 충남의 의병활동도 을미의병의 경우 유림의 대의에서 시작했지만 병오의병은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지역과 학연, 신분을 구별치 않고 참여했다. 그런 의미로 충남의 의병기념관은 개인기념관 형태보다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적 구성이 필요하다. 충남을 비롯 의병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전남이나 경기도의 경우도 의병기념관이 전무한 실정으로 의병에 대한 기억이나 기념이 활발하지 못하다. 전국 8개소의 의병기념관도 개인 추모 기능이 강화된 사우에 부설된 소규모 기념관이 대부분이다. 앞서 포럼에서도 지역의 의병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시민들에게 기억을 각인시키고 역사를 재생하는데 특정 개인사에 그치는 한계가 있어 역사적 주제나 지역단위의 의병기념관 설립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의병기념관이 강원 1개소, 충북 1개소, 전북 3개소, 경북 3개소에 설립되어 있는 반면, 충남에는 전무하다. 위 지역들 못지않게 홍성, 당진 등 충남 여러 지역에서 치열한 의병전쟁이 전개되었음에도 이 역사를 지역공동체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 대중의 기억으로 되살릴 수 있는 기념관이 없는 실정이다. 2017년 기준 대한민국의병도시협의회 참여 지방자치단체는 충남 아산시, 당진시, 금산군, 청양군, 홍성군을 비롯 서울 성북구, 인천 남구, 울산 북구, 광주 광산구, 대전 유성구 경기 안산시, 이천시, 가평군 강원 영월군, 횡성군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 보은군, 증평군 경북 경주시, 영주시, 문경시, 청송군, 봉화군, 울릉군 경남 진주시 전북 완주군, 무주군, 고창군 전남 나주시, 광양시, 담양군, 구례군, 보성군, 영암군 등 36곳이다. 물론 이들 지역뿐 아니라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자체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지자체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의병도시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역사는 순회한다. 우리는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역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미래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그것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역사를 재생산하고, 그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이 기억과 기념을 위해 지역내 공공기념관은 필수적이다. 기념관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역사를 마주하며 자긍심을 갖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유산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공공시설로서 기념관은 지역사회에 문화적, 교육적 책임을 갖고 기억과 기념의 책무를 수행해 나아가야 한다. 기념관은 전시, 프로그램, 행사, 축제 등 기념관에서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통합하고 지역 정체성과 연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지역에 산재한 기억의 공간과 장소,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하나로 연계하고 지원할 수 있는 센터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기념관의 역할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념관의 독자적인 존립이 아니라 기념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상징성이 드러나고 확산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대다수 기념관들은 설립이후 무관심으로 설립 취지를 살리지 못해 상징성마저 주민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절의 고장 충남’이라는 정체성을 살려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섰던 충남 의병들의 실태를 토대로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인 기념관의 설립은 물론 향후 이를 통해 역사의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향후 충남의병기념관 설립을 위해 지속가능한 장기계획이 필요하다. 기념관 운영에 필요한 조직 구성, 직원 배치, 연구계획, 사업계획, 중장기 예산투입 계획, 중장기 발전계획 등을 관련 법률이나 조례로 명시하고 개관 후 법률적 근거에 의해 흔들림 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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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3"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➀)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➁)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➂)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으로 나오는 장승구(장포수)역의 최무성이 제자이자 의병인 주인공 고애신역 김태리에게 한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스승이자 의병장인 장포수처럼 병오의병(1906)이전까지 의병들이 주로 유학자나 전직관료들이 중심이었다면 그 이후 의병들은 특정계층에서 벗어나 실전 중심의 의병으로 변화한다. 홍주의병을 주도한 이는 김복한과 이설이었으며 전·현직 관료는 물론 관군·향리·농민·보부상까지 참여하였다. 이들은 학통·지연·혈연 등의 연고로 조직되어 점차 신분·당파·학파를 초월하는 범민족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김복한의 ‘사공(事功)’의 실천결과로 볼 수 있다. 사공(事功)은 도학적인 명분만을 내세우지 않고 국운회복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그 사례는 명성황후의 혈족인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계파가 다른 화서학파의 최익현과 연합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실제 김복한은 "사공의 실천은 스승이었던 남당이 가장 높은 경지에 자리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공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김복한은 1903년 임공우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사공은 왕성장미(往聖將微)를 잇는 것이고, 전현미발(前賢未發)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며, 제유의 득실을 분별하는 것으로, 전통・권위에 반하는 이단의 그릇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실천한 자는 남당 한원진 한분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유림계의 의병항쟁은 성리학적 명분이 아닌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관점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에 항거한 국권회복 운동은 국가에 대한 충절의 정신이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은 군인들로 하여금 의병에 적극 가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의병활동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병오의병 이후 대의명분보다 실질적인 군사활동으로 변모한다. 충청도 의병 가운데 병오의병 이후를 대표할 만한 분이 을미의병과 병오의병에 모두 참가했던 이세영 의병장이다. 고광(古狂) 이세영 선생(李世永 1869~1938)의 부친은 오늘날의 경호처 차장이라 할 수 있는 용호영 내금위장 출신 이민하(李敏夏)다. 이세영 선생은 병인양요(1866)때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공을 세운 양헌수(1816~1888)에게서 배웠다. 그의 스승인 양헌수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해 병인양요에서 승리했으며 삼군부사, 공조판서, 독련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세영 선생은 20세인 1889년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인 청양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약장(約長)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5년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으로 이설(李偰), 이상린(李相麟), 안병찬, 이봉학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간계로 패퇴하여 12월 4일 김복한 등 23명의 동지가 붙잡혔다. 이때 김복한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의병을 모집하러 갔던 이세영 선생은 홍주의병과 밖에서 응원하던 청양군수 정인희와 김정하·이병승 등과 12월 6일 정산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철마정(鐵馬汀) 일대에서 공주부의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패한 선생은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아관파천(1896) 후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1896년 2월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군에 입대해 육군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헌병대장서리를 지냈다. 1904년 낙향하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다. 홍주의진에서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1907년 철도(鐵島)로 이배된 후에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전라·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평안·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소장을 맡았고,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인 1917년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어 재만주 독립군의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1930년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을미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충남 공주 우강 출생 만오(晩悟) 이상린(1856~1946) 선생은 간재 (艮齋) 전우(田愚 1841~1922)문인으로 간재학파 대부분의 문인들과는 달리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이상린 선생은 음서로 천거되어 제천서 군서기관으로 지냈으나 퇴임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유동희, 이봉학 등과 함께 상경하여 궁문 밖에서 을사5조약을 무효화 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한계에 달하자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선생은 함자를 상린에서 상규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유림이 참여한 인도공의소는 선생이 대표를 맡아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백관형·최중식을 비롯하여 유준근·이길성·황일성·오석우·이내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인도공의소의 목적은 규칙 제2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도상 윤리를 천명하야 세계를 작신”함에 있었다. 규칙 제3조에 의하면, 공의소의 본부는 경성에 두기로 하였으나 홍성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립 후 인도공의소의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자 홍성의 유림들은 1927년 선생을 회장으로 유교부식회를 설립해 인도공의소의 활동을 이어갔다. 유교부식회는 인도공의소의 설립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사상을 부흥하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1927년 홍성에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지산 김복한 선생의 장자인 김은동을 비롯하여 오석우·전용욱·최중식·황일성·이영규·김노동·최명용·김경태·이우직·정태복·김익한 등이었다. 유교부식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정기강연회 실시와 그리고 태안․청양․공주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유교사상의 보급과 충의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한편 윤봉길(1908 ~ 1932)도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전용욱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용욱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유교부식회의 강학부를 맡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이때 윤봉길이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병오의병 이후 충남지역 의병은 홍주는 물론 공주, 아산 등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전개되었다. 서산과 당진지역에서는 정주원 의병의 활동이 돋보인다. 당진 출신인 정주원은 1907년 8월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100~150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경기, 충남지역의 의병연합체인 13진 창의소 총대장에 추대되어 경기도 죽산·양지·수원·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일본경찰서를 공격하고 우편체송인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외에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의병을 고발하는 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지역에선 소난지도에서 의병과 일본경찰대와의 전투는 1908년 3월 15일 있었다. 소난지도 의병은 홍성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와의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백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일본경찰대는 의병으로부터 노획한 다수의 식량에 석유를 끼얹고 소각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홍주의병 이후 차령산맥의 줄기를 타고 가야산, 덕숭산, 용봉산, 칠갑산, 비봉산, 오서산, 성주산 등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의병의 게릴라식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지역에선 보령 출신으로는 김석원, 박일복, 박정문, 성주경, 오경춘, 윤창영, 이규상, 이종갑, 이종국, 장석홍, 최정보, 한엇동 등이 있다. 서천 출신은 김삼석, 김정도, 백치서, 유형식, 이장준, 최봉석 등 6명, 홍성 출신은 윤경구, 이필봉 등, 청양 출신은 김순보, 이규하, 이소선 등, 그리고 예산 출신은 차치명 등이 확인된다. 을미와 병오년 이전 의병 활동이 미미했던 천안과 아산 그리고 공주와 부여, 논산, 금산 등에서도 1907년 군대 해산이후 의병항전이 활발했다. 천안에선 목천을 중심으로 광덕산 등 산악지역과 충북 경계지역에서 천안 출신의 신영칠, 이정구 등과 아산 출신의 서병림, 이규남, 이준영 등의 활약이 확인된다, 또 계룡산 주변인 공주와 논산 지역, 그리고 전북과 산악지대로 경계하고 있는 금산 지역에서는 공주 출신의 강덕보, 노성삼, 노원섭, 노치흠, 이덕경, 이사건, 이원선, 이원오, 이춘성, 이학현, 장남일, 최경휴 등 부여 출신의 권운택, 김광선, 김판돈, 신봉만, 이덕현, 이박원, 이성택, 정용운, 한기안, 한사용, 한성수, 한학삼 등 논산 출신의 김광옥, 김말출, 김성천, 김운서, 김원중, 배을룡, 신광삼, 윤치담, 이규철, 이창규 등 금산 출신의 강이봉, 김백원, 김부개, 김진철, 방치경, 이향운, 임해준, 장선군, 장한갑, 최점록 등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산속에 근거지를 두고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1909년 10월 이후 일제의 대규모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더욱 소부대 단위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점차 소멸되었고 의병들은 항전의 무대를 간도 등 해외로 옮기거나 국민 교화를 위한 교육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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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2"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영흥부사로 있던 수당 이남규 선생(1855~1907)이 역적을 토벌할 것을 상소한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향리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지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홍주의진에 참여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떨어지자 민종식 선생을 숨겨 주고 재기를 도모하다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서울로 압송 중에 일본의 회유에 저항하자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피살되었다. 수당의 일가는 수당을 비롯 아들 충구와 손자 승복 등 3대가 모두 국립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증손자인 장원도 6.25 당시 소대장으로 근무 중 전사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등 4대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또 수당의 종형제인 춘당 이용규는 1906년 매부인 민종식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1차 의진 이후 충남 남부와 전북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홍주의진에 큰 힘을 보탰다. 민종식의 2차봉기 당시 참모로 활약하고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사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구연(龜淵) 채광묵(1850~1906)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김복한, 이설, 박창로, 안병찬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채광묵의 기백에 감동하여 내부주사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이만식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 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채규대와 함께 전사하였다. 규당(規堂) 안병찬(1854~1929)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 안창식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여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이설·임한주·이근주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청양 합천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월 23일 박창로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홍주의진이 실패하자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안병림을 비롯 윤난수·이필한·조광희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 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은(二隱) 박창로(1846~1918)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1895년 12월 2일 박창로는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홍주성으로 들어가 다음 날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봉기하였다. 박창로는 1906년 3월에 봉기한 홍주의병에 다시 참여하였다. 민종식을 대장에 추대한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 예산의 광시장터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막혀 후퇴하였다. 의진은 화성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았고, 항전하던 박창로는 안병찬을 비롯한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 박창로는 풀려난 뒤 홍주의병에 다시 가담하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박창로는 민종식 등 지휘부와 함께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박창로는 공주감옥에서 풀려난 후 안병찬과 함께 정산의 칠갑산에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1918년 사망하였다. 고광(古狂) 이세영(1869 ~ 1938)은 내금위장 이민하의 아들로 1895년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부여 홍산으로 도피, 이듬해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전했다. 1897년 육군 참위에 임명, 이듬해 부위가 되고 1902년 정위에 승진,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 후 사직, 1904년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채광묵 등과 의병 모집을 협의, 1906년 민종식을 대장으로 삼고 참모장이 되어 홍주)에서 싸우다 피체, 종신 유형을 선고받고 황주에 유배, 그 후 철도에 이배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1908년 동생 창영과 성명 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후진 교육을 담당했고, 이듬해 대한 협회의 은산 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국권침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 상교가 되었으며 신흥 무관 학교 교장, 통군부 사령관, 한교 교육회 이사장, 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역임, 상하이에 가서 임시 정부 참모부 차장을 지내고, 쓰촨성에서 병사했다. 홍주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을미사변은 물론 경오의병에도 대부분 참여했으며 의병 활동 중 사망하지 않은 경우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에도 국권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들의 애국활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 이어졌으며 이세영의 경우처럼 무장투쟁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또 자신뿐 아니라 대를 이어 국권회복에 나서는 충절을 이어갔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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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④-1"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시사픽] 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병오년 홍주의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를 떠나는 홍주9의사 가운데 한분이셨던 보령의 유병장 유준근 선생이 쓴 마도일기(馬島日記)의 한부분이다. 5월 19일 민종식의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그달 31일 성이 함락되면서 80여 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45명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80여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6월 9일(음력 윤 4월 18일)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던 의병들은 7월 말 70여 명이 석방되었지만, 홍주의진의 참모였던 남규진·문석환·신보균·신현두·안항식·유준근·이상두·이식·최상집 등 이른바 '홍주 9의사'는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 중 남규진·신현두·유준근·이식 선생 등 4명의 의사는 일제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고국산천을 떠나 적국인 대마도로 호송되는 선생의 쓰라린 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병오 홍주의진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미년(1895)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이 상경하여 을사5적과 일본인 하세가와 등을 척결할 것과 의병을 모집해 일본세력을 축출할 것 등을 상소했다. 이때 청양 정선에 거주하던 전 참판 민종식도 상경해 상소를 올리고자 이설에게 상소문 초안을 부탁하고 민영익과 민영휘 등을 만나 상의했으나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두라는 그들의 만류와 김복한, 이설 등이 체포되고 상소문마저 압수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왔다. 민종식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했는데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과 채광묵 등이 홍성·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유림에서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남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주와 청양의 유림에서 민종식을 응원(應援)으로 최익현을 맹주(盟主)하고 거의할 것을 요청했지만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서 거병하게 된다. 최익현 선생이 떠나자 유림은 민종식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하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5만냥(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1906년 3월15일 정산 천장리에서 거병했다. 민종식 선생과 홍주·청양의 지사들은 3월 17일 예산 광시 장터로 진군하고 다음날 의병들은 홍주성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홍주성 밖 하우령(지금의 홍성군 구항면과 홍성읍 우회도로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청양 화성 합천으로 물러나고 3월19일 새벽 공주진위대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여명과 합천에서 마주해 전투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화승총과 칼을 들고 싸웠지만 관군을 무찌르지 못하고 의병 수뇌부인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수십 명이 체포되어 공주관찰부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때 압송된 안병찬 등은 수일 후 방면되어 다시 의병에 합류하게 된다. 1차 기병에 실패한 민종식은 5월 12일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아 충남 홍산군 지티동 (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다시 국권회복의 기치를 들었다. 민종식의 처남인 이용규가 전라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중심으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고 이튿날 서천읍에 이르니 의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다음날 비인을 점령했으며, 유준근 등 의병이 합류해 보령 남포성에서 5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해 하루를 보내고 5월 19일 홍주로 들어가 삼신당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의병들은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들어갔다. 종식은 판서 민영상의 아들로서 국변(명성황후의 살해)을 아프게 생각하여 가재를 풀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사들이니, 호서지방의 사민들은 추종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였다. 남포·보령 제군을 습격하여 그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순찰하는 일본군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5월 20일에 홍주로 들어갔다. 지난번 일본군은 홍주성은 족히 믿을 만하다 하여 포병 약간을 배치하고 대포 10여 문을 매설하였는데, 모두 민종식의 소유가 되었고, 부서별로 나누어 지키니, 명성과 위세가 몹시 왕성했다.” 매천 선생 역시 1910년 국난을 당하자 순절을 택한 선비였으니 그가 홍주의진을 보는 시각은 자명하다. 다만 매천은 직접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전해들은 것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홍주성 입성 날짜 등에 차이가 있다. 또 홍주의병의 홍주성 입성 상황을 홍순대는 해암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홍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광천장터에 살고 있는 왜놈 6명을 사로잡았다. 4월 26일(양력 5월 19일) 홍주 남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이날은 홍주 장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4시쯤 성을 함락하려고 하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홍주성의 4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진영의 아주 날쌘 병정 2명이 성에 들어갈 곳을 찾다가 하수구를 발견하고 거기로 들어가 4대문을 열었다. 드디어 홍주성은 함락되었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천문과 천학순이었다. 의병들이 성안에 살고 있던 왜적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홍주의진은 마침내 홍주성을 무력으로 탈취했다. 홍주성에서 도망친 일본군은 공주에서 병력을 지원 받았다.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을 빼앗긴지 하루만에 반격을 해왔다. 하지만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21일 수원 헌병 부대에서 파견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24일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부대와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 29일에는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였다. 일본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전세가 의병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 보병 60연대의 대대장 다나까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보다 화력이 우세하였으며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5월 31일 새벽 2시 반 일본군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하였다. 이를 신호로 일본군 보병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렇게 하여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때 양민들 역시 다수가 살해되었다. 미명의 새벽, 홍주성 동문이었던 조양문을 폭파하고 들이닥친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살상을 저지르니 홍주성은 일시에 아비규환 속에 빠졌다. 민종식 선생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성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채광묵 부자를 비롯한 80여명의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생포된 의병이 145명이었으니, 홍주성을 점령한 지 13일째인 5월 31일이었다. 이날의 격렬한 전투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 6월 15일자에는 "홍주군 정형을 들은 즉 일본 군대가 의병을 습격할 때 의병은 기미를 알고 흩어져 모두 제거하지 못하고 무고한 거주민을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일로전쟁시 만주를 점령함과 같이 일본인민을 점차 이주케 할 계획이라 하니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천하를 얻어도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한 주(州)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한 성을 점령했으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할 말을 잇지를 못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매천야록’에는 "홍주 10리 안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없어졌으니, 병마에 짓밟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날 포로로 잡힌 유준근·이식·신현두·남규진은 종신 유배형, 문석환·안항식·신보균·최상집·이상두는 3년 유배형을 받고 대마도로 끌려갔다. 이들보다 두달 후 태인에서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3년 유배형을 받고 역시 대마도에서 이들과 조우한다. 지산 김복한 선생이 거의한 을미의병 때 초모사로 외지에 나가 의병을 모집해 붙잡히지 않았던 이세영도 6월에 체포되어 황주의 철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한편 민종식 선생은 이날 성을 탈출해 예산의 이남규 집으로 피신해 재차 거의를 꾀했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과 관군 그리고 일진회원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 부자가 체포되고, 민종식 선생은 다시 공주로 피신하였으나 11월 20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도중 이남규 부자는 신창 평촌에서 살해되었다. 민종식 선생은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결과 교수형이 언도되었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 즉위에 맞춰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다 1917년 6월 숨을 거뒀지만 일제는 민종식 선생을 ‘폭도’로 규정해 선영에 묻히지 못하다가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선영에 묻힐 수 있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