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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③[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동학혁명을 빙자해 군대를 파견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구제도를 일거에 바꾸는 갑오경장(1894년)을 단행했다. 그러나 조선의 주도 세력인 유림은 일본이 주도했던 경장에 반대해 곳곳에서 저항했다. 특히 경장을 통해 기존의 복제를 바꾸고 일본에 비협조적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1895년)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일본의 만행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의병들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조정이 단발령을 선포하자 의병활동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당시 유림은 외세에 맞서 척사(斥邪)를 주창했고 이들은 의리론에 입각해 외세에 대항한 것이다. 충청권에선 대표적으로 남당 한원진의 호론계열인 남당학파, 연재학파 등이 거의(擧義)와 순절(殉節)로 의리를 보였고 낙론계인 간재 전우의 간재학파는 자정(自靖)의리로 일제에 대항했다. 이들 외에도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잇는 화서학파는 강원과 충북에서 활동하며 의암 유인석,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위정척사론에 바탕을 두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라도의 노사 기정진의 문인 중심의 노사학파, 경상도에선 한주 이진상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한주학파가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남당학파는 한원진 이후 한간 김한록과 운평 송능상 등이 호론계를 이끌었으나 정치적으로 벽파의 거두였던 김한록과 벽파세력인 사촌누이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사후 몰락해 세가 크게 줄었지만 심재 송환기, 강재 송치규에 이어 지산 김복한 선생이 남당의 학맥을 이어갔고 송치규의 문인인 송달수를 통해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으로 우암 송시열의 가학을 이어가는 연재학파로 발달했다. 반면 외암 이간 선생의 낙론계열은 율곡을 사숙한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도암 이재를 중심으로 발달해 미호 김원행으로 연결됐고 근재 박윤원을 거쳐 매산 홍직필에 이어 고산 임헌회가 간재 전우에게로 학통을 이었으며 이들은 자정의리를 주장했다. 충남에서는 홍주의병에 앞서 공주부 진잠현감 출신 문석봉이 공주 유성(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명성황후 시해와 폐비조칙을 ‘천고에 없는 대변(大變)’이라며 반발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9월 18일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단발령이 공포되자 지산 김복한과 그의 이종형인 복암 이설, 그리고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 등이 주동이 되어 홍주에서 거의(擧義)하게 됐다. 충남의 을미의병을 주도한 이들은 홍주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남당 한원진의 호론계열 유림들이었다. 의병을 이끈 지산 김복한은 홍주향교 도유사이고 의병에 참여한 서승태 역시 홍주향교 도유사 출신이며 홍주향교는 항일의병의 진원지였다. 지산 김복한은 병자호란 당시 자결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의 12대손이며 파시조인 수북 김광현의 종손으로 홍주 오촌동(鰲村洞)에서 수복이 복상하며 은거해 이 무렵부터 홍주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김복한은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승지 등 당상관에 올랐으나 3년만인 1894년 갑오경장이 발표되자 낙향했는데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종사촌형인 복암 이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앞서 홍주에서 거의 움직임은 1895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안창식(안병찬의 부) 등은 개화파들에 의한 갑오개혁을 반역행위로 인식하고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의병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8월 20일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는 등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활동은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뒤 더욱 구체화 되었다. 안창식 등은 11월 18일 청양의 화성(化城)의 이인영의 집에서 100여명의 유생이 모여 향회를 실시, 이후 18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안병찬과 채광묵 등 지방 유생들이 이들을 이끌고 12월 1일 홍주관아에 집결했다. 그들은 관찰사 이승우를 설득하는 한편 참사관 함인학, 경무관 강호선 등을 체포해 구금했다. 12월 3일, 홍주성에 창의소가 설치되었고 김복한을 의병 총수로 추대했다. 김복한은 ‘존화복수(尊華復讎)’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였다. 관찰사 이승우 역시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관내 각 군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이끌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가 거의의 뜻을 번복하여, 창의소를 차린 뒤 하루만인 12월 4일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주동자급 23명이 구금되고, 결국 을미년의 홍주의병은 전투도 없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896년 1월 12일 이들 중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 등 6명(일명 ‘홍주6의사’)은 서울로 압송되어 2월 23일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당일 고종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되었다. 한편, 청양에 별도로 창의소를 설치하고 홍주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던 청양군수 정인희는 12월 6일 이세영·김정하·이병승 등과 정산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철마정(鐵馬汀)일대에서 공주부의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 비록 김복한 등은 관찰사의 배신으로 의병이 와해됐지만 창의 당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외부로 나섰던 홍주권의 유림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의병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근주는 서산·태안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했으며, 전수사 조의현을 찾아 청양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공주지역 소모관으로 나섰던 이세영은 정산 철마정 전투 참가 이후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등 홍주지역 유림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을미의병은 임진왜란 의병들처럼 근왕이념이 기저에 있지만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같이 목표를 위도(衛道)에서 위국(衛國)으로 바꾸어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 을미의병에 참여한 유림들은 김복한과 이설처럼 전직관료 출신의 노론계 호론 중심의 인물들이 의병을 주도했지만 안병찬, 안창식, 박창로, 이세영, 이봉학 등 소론 출신의 지방 유림이 힘을 합쳐 당색의 구별없는 구국투쟁을 벌였다, 유림들은 척사의 대상을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리집단으로 보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한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전개해 의병층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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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충남 유치 토론회 ‘파행’[시사픽] 육군사관학교 이전과 관련 15일 국회에서 육군사관학교 이전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육사 출신 인사들의 방해로 토론회가 중지되는 파행을 겪었다. 이날 토론회는 김종민 국회의원과 지방신문인 대전일보가 주최하고 충남도와 홍문표 국회의원이 공동주관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토론회 이전 객석을 점령한 시민단체들은 ‘육사에 호국영령들의 묘가 있음에도 이를 이전하느냐"가 주된 반대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김태흠 충남지사와 충남지역 이전을 반대하는 피켓도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주장은 육사에 묻힌 1기와 2기 250명 등 선배 묘역의 이전 반대가 주를 이뤘다. 결국 이날 토론회는 이세영 교수(건양대 군사학과)가 ‘국방인재 육성 새로운 100년을 여는 길, 육사 이전이 답이다’를 주제로 기조발제 한 것을 끝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욱군사관학교 이전 문제는 대전과 충남 논산의 국방클러스터 조성의 핵심부분이다. 이미 계룡시를 비롯한 대전과 인근 충남지역에는 3군본부를 포함 국방관련 주요시설들이 이전해 있다. 이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은 이 지역 국방 클러스터의 중요성을 인식, 후보시절 육군사관학교 이전을 공약 한 바 있다. 하지만 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후보 당시 경북 안동에 육군사관학교를 이전하겠다는 발언으로 지역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의 충남 이전은 전쟁발발시 교육기능의 유지와 국방 클러스터 조성을 통한 융·복합적 교육 여건, 국방분야 국가 균형발전의 완성 등 이점이 있는 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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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➁[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탈을 당할 때마다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저항했다. 대표적인 민초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임진왜란을 통해 나타났다. 도성이 왜군의 침입에 불과 20여일만에 침탈당하고 개전 초기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지만 유생들의 창의로 거병한 의병들은 곳곳에서 왜군들을 괴롭히며 단독으로 성을 탈환하거나 관군과 함께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충청도의 조헌(趙憲)부자·박춘무(朴春茂),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세아(鄭世雅)·권응수(權應銖)·김해(金垓)·곽준(郭鵔)·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정경세(鄭經世),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임계영(任啓英), 경기도의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이정암(李廷馣,)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승병으로는 최초의 승병장인 영규(靈圭)와 휴정(休靜, 西山大師)과 그의 제자들인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 松雲大師), 호남 지리산의 처영(處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료이거나 지역의 명망있는 유림이었지만 거병에 참여한 의병들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에도 의병이 봉기했는데 동기는 관군의 패배로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자는 데 있었다.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왜란에 비해 활발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왜란에 비해 호란은 짧은 시간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청나라에 굴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남의 사계 김장생(金長生)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했다. 또 정봉수(鄭鳳壽)는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이끌고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쳐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구한말에는 일제가 일으킨 을미사변(1895)과 을사늑약(1905)에 항거한 의병활동이 눈부시다. 구한말의 의병은 크게 1895∼1896년의 을미의병과 1905∼1910년의 을사, 병오, 정미 의병으로 나뉜다. 을미의병은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며 일본에 의해 복제의 변형, 민비시해사건, 그리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효시는 유성의병이다. 충남 진잠현의 현감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음력 8월21일 시해되고 이틀후에 폐비조칙이 발표되자 한달도 채 되기 전인 9월 18일 유성(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이 12월 1일에 봉기했고, 1896년 1월 하순 유생 이소응(李昭應)이 춘천에서 봉기하여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금산에서 이은찬(李殷瓚)·허위(許蔿),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남한산성·안성에서 김하락(金河洛),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 등이 일어났다. 이들 의병활동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의병이 일어난 지 한달만에 김홍집(金弘集) 친일 내각이 붕괴되어 단발령이 철회됐고 김복한의 경우처럼 고종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특사로 풀어주는 등 의병을 선유(宣諭)해 일제는 침략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통해 통감정치를 시도하자 국권 상실을 우려한 우국지사들의 저항에서 비롯됐다. 이 시기의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이었다. 1906년 5월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월 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충남 청양에 머물던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해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해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민종식과 최익현의 의병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정미년(1907)의 한국군대 해산은 의병 활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들 해산된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의 의병장은 원주의 원용팔(元容八)·민긍호(閔肯鎬),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이하현(李夏玄)·정환직(鄭換直)·정용기(鄭傭其)·최성집(崔聖執)·신돌석(申乭錫)·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백낙구(白樂九)·양한규(梁漢奎)·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함경도의 홍범도(洪範圖), 그리고 충북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일본 경찰이 낸 통계이기는 하지만 1908년 의병들은 1976회에 걸쳐 8만2767명의 의병이 참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들중 충남의 의병은 217회(11.0%)의 전투에 7666명(9.2%)의 의병이 참여했다. 또 1909년에는 전국적으로 1738회의 전투에 3만8593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충남은 1003명(2.5%)의 의병이 138회(7.9%)의 전투를 벌였다. 이들 의병들은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각처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관아를 비롯해 면사무소, 경찰분파소, 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을 파괴했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 토벌에 나서 본국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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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➀[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충남도의회는 올 11월 임시회에서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조례를 행정문화위원회에서 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도의회는 지난달 이종화 의원(홍성2)과 방한일 의원(예산1)이 각각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같은 내용의 조례를 지역을 달리한 의원들이 각각 발의한 것은 의병기념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기념관의 설립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을 낳고 있다. 충남은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매번 국가의 존망 위기에 의병들이 거의해 외세에 대항해 왔다. 임진왜란 이전 공주에서 계수제독관으로 부임해 제자들을 양성한 중봉 조헌 선생이 공주를 중심으로 자신의 제자를 비롯한 1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성으로 향하던 중 금산벌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700여명의 의사 순절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논산의 사계 김장생 선생은 정묘호란 당시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집해 당시 공주로 내려온 소현세자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조선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살해되고 폐비가 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 승지 지산 김복한 선생과 그의 내종형인 전 응교 복암 이설 선생 그리고 홍주 전교 안병찬 등이 홍주에서 결진해 의병을 일으켰다. 비록 3일만에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을미의병 가운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의였다.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등박문과 을사5적을 처단할 것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고 후일 김복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이후 홍주성을 점령했던 퇴초자 전 참판 민종식선생은 명성황후의 족손으로 아버지는 고종때 충청도 관찰사와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판서를 두루 거친 민영상으로 명문출신이다. 그는 김복한, 이설 선생과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산현(청양군 정산)에서 창의해 한때 홍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일본군의 참전으로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충남지역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이 일어난 이유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정신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봉 조헌 선생이나 사계 김장생 선생은 물론 지산 김복한 선생이나 퇴초자 민종식 선생 등의 면면에서 보듯이 이들은 유학자로써 성리학의 근본인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들이다. 특히 조선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 선생은 조선 후기 율곡과 우암의 학통을 이은 남당 한원진의 호론을 몸소 실천한 실천궁행의 유학자이다. 율곡학파의 정수가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에서 남당 한원진을 거쳐 노론 벽파의 거두 김한록에 이르러 정쟁으로 세가 크게 줄었지만 홍성지역의 남당학파는 송능상-송환기-송치규를 거쳐 지산 김복한과 가학을 계승한 연재학파로 이어졌다. 남당학파와 연재학파의 거의(擧義)와 순절(殉節)은 존화양의(尊華攘夷)를 기본에 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춘추대의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또 지산 김복한 선생은 생전에 교육기관인 인지서와 인도공의소를 설립했고 사후 지산 선생의 인도공의소 정신을 이어 설립된 유교부식회는 민족정신과 항일운동을 매헌 윤봉길에게 전해 독립운동에 나선 윤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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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낭만으로 물든 강경포구의 붉은 저녁노을[시사픽] ‘2022 강경젓갈축제-강경젓갈이 상월고구마를 만나다’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진풍경이 바로 노을로 붉게 물든 강경포구의 저녁하늘. 강경읍 전역을 물들인 붉은 노을과 함께 축제의 세 번째 밤이 깊어지고 있다. 축제는 16일까지 이어지며 ▲엄빠와 함께하는 전국 젓갈요리 경연대회, ▲논산예술인 마실페스타 ▲강경포구 전국어린이 동요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전국의 관광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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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미래비전 공유 워크숍. 해뜨는 서산 구현을 위한 소통의 장 마련[시사픽] 충남 서산시의 간부급 공직자들이 미래 전략사업 추진과 협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시는 지난 12일 스플라스 리솜에서 이완섭 서산시장을 비롯한 간부급 공무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 만족 행정 서비스 공감대 확산을 위한 ‘미래비전 공유 워크숍’을 열었다고 밝혔다. 첫 순서 ‘미래의 장’에서는 김웅이 한서대학교 항공교통물류학과 교수의 ‘서산공항 개항을 맞이하는 서산시의 대응과 미래전략’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김 교수는 “서산공항은 2017년 국토부 사전타당성 조사 결과 B/C 1.32로 이미 경제성을 확보했다”며 “국제여객선 취항, 해미국제성지 조성 등을 고려하면 수요는 충분하다”고 말하고 서산 공항 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항공 네트워크 형성 측면에서 서산 공항과 다른 지자체 공항 개발사업을 연계해, 서산 공항의 개발의 필요성과 개발 시점의 적정성을 높이는 전략적 논리로 접근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공항 건설과 연계한 시 발전 전략으로 배후 산업단지 개발, 가로림만, 보령해저터널 등 관광 자원과의 연계, 지역거점 항공사 유치 등을 제안했다. 두 번째 순서 ‘도약의 장’에서는 이완섭 서산시장이 직접 강사로 나섰다. 이 시장은 대내·외 여건 및 현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통찰을 바탕으로 민선8기 출범이 지니는 의미를 되짚고 시가 나아가야 할 목표와 전략을 제시했다. 이 시장은 “성장의 속도와 방향이 남다른 도시, 일방의 빈 곳을 채워주는 만족도 높은 도시가 시민의 바람이자 민선8기의 지향점”이라며 역동적인 경제성장, 국토 균형발전, 시민의 삶의 질 제고 신뢰받는 공직사회를 시정 철학으로 내세웠다. 취임 100일간의 성과를 분석하는 한편 “해뜨는 서산의 진정한 가치를 구현하자”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1천 8백여 구성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 시장은 공직자로서 걸어온 길을 설명하면서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직자의 자세를 강조하고 시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당부했다. 세 번째 ‘소통의 장’은 시 주요 현안과 관련된 정책 퀴즈와 공감토크를 진행하며 구성원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특히 이 순서는 SNS 단체채팅방과 전자투표기를 활용한 실시간 질의응답 방식으로 진행돼 참석자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고 흥미를 돋우는 등 많은 호응을 얻었다. 워크숍에 참석한 한 공직자는 “서산시의 미래 발전 전략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며 “시 미래가 달린 전략 사업 추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업해 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완섭 시장은 “리더 한 사람의 능력으로 조직 전체의 역량이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며 “구성원 하나하나가 조직의 목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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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린다[시사픽] 태안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리는 공모전이 개최된다. 군은 태안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어우러진 고품격 건축문화를 조성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건축문화 활성화를 위해 ‘제7회 태안건축문화상’ 공모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지난 2006년 처음 시작된 태안건축문화상 공모전은 격년제로 실시하다 2012년 이후 3년 주기로 변경됐으며 지난해 개최 예정이던 제7회 태안건축문화상이 코로나19로 연기됨에 따라 4년 만에 군민들을 찾아오게 됐다. 주택·공공·기타 등 3개 분야에서 우수작을 선정하며 그동안 천리포 에코힐링센터 및 방문자센터 학암포 종합관리사무소 태안새마을금고 회관 한국서부발전 본사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을 비롯해 펜션과 개인 주택, 상가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공모 대상은 2018년 12월 5일부터 2022년 10월 31일까지의 기간 중 관내 사용 승인된 모든 건축물로 응모를 원하는 건축 관계자는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60cm×90cm 규격의 패널과 응모신청서를 11월 18일까지 군 신속민원처리과에 제출하면 된다. 패널에는 건축개요, 배치도, 평면도, 입면도, 주단면도, 교통 처리계획도, 조경계획 등을 표현할 수 있으며 제출 작품에는 제출자를 인식할 수 있는 표시를 할 수 없으니 유의해야 한다. 접수 마감 후 12월 태안건축문화상 심사위원회 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연말 수상작을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 및 동판 표지판 수여와 함께 군청 내 작품 전시 및 홍보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군 관계자는 “이번 건축문화상 공모를 통해 건전한 건축문화 조성에 앞장서고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삶의 공간을 창출해 아름다운 태안 건설에 기여하고자 한다”며 “제7회 태안건축문화상 공모에 관내 건축 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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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중소기업 해외시장 개척단’ 새로운 활로 개척[시사픽] 홍성군이 주최하고 충청남도 경제진흥원이 주관한 ‘2022 중소기업 해외시장 개척단’이 소기의 성과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이번 개척단은 군내 수출 중소기업 9개사 11명이 참가해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베트남 호치민에서 현지 바이어와 수출상담회를 진행했다. 인도네시아 상담회에는 Salim 그룹 계열사 NIKKO 등 한국제품에 큰 관심을 보이는 바이어 등 25개사가 참가했으며 베트남 상담회에는 베트남 전역에 마켓을 운영 중인 샤크마켓 바이어 등 22개사의 바이어가 참가해 1:1 비즈니스 수출 상담이 이루어졌다. 이번 상담회를 통해 총 113건, 9,702,400달러의 상담을 진행하고 1년 이내 3,935,300달러의 계약을 전망하고 있으며 상담회 자리에서 6개 업체가 9건의 MOU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이번 상담회를 위해 충청남도 경제진흥원 통상사무소에서 유망한 해외 바이어 발굴 및 섭외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줬으며 향후 계약 진행을 위한 수출업무 보조 등 사후관리 업무를 참여 업체에 지속해서 지원해 줄 예정이다. 이용록 홍성군수는 "홍성군 경제의 근간인 중소기업의 새로운 활로 개척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파급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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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2023년 청년 어촌정착 지원” 대상자 모집[시사픽] 홍성군이 청년 수산업 경영인의 안정적인 경영 지원을 위한‘청년 어촌정착 지원’ 2023년도 사업대상자를 다음달 11월 11일까지 모집한다고 밝혔다. 사업대상자는 수산업 독립경영 3년 이하인 만 18세 이상 만 40세 미만 청년으로 지침 개정으로 인해 지원 자격은 어업, 양식업뿐만 아니라 수산물 가공 수산물 유통업까지 확대됐다. 선정된 청년 수산업 경영인은 경영 연차에 따라 최대 3년간 월 90~110만원의 경영비 및 가계 자금을 지원받게 된다. 사업 신청은 다음 달 11일까지 사업신청서 계획서 등 구비서류를 갖춰 홍성군 해양수산과로 제출하면 되며 군은 사업 신청자들에 대해 향후 12월 경 서면 및 면접 평가를 거쳐 최종 사업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장동훈 해양수산과 과장은 “어촌지역의 활력과 어촌소멸 방지를 위해 젊은 층 유입이 필수적인 만큼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청년 수산업 경영인들의 양성을 위해 다양한 연계 사업을 발굴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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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 복지 향상 위한 사회보장정책 이정표 마련[시사픽] 충남도가 도민 복지 향상을 위해 수립 중인 제5기 지역사회보장계획을 최종 확정하기에 앞서 도민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도는 13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도민과 현장전문가, 사회보장위원, 공무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기 지역사회보장계획 확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계획 수립 대행기관인 충남사회서비스원은 ‘함께하는 따뜻한 복지, 힘 있게 성장하는 충남’을 목표로 설정해 마련한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계획안은 사회보장사업 5개 추진 전략과 38개 세부사업, 4개 균형발전 추진 전략과 16개 세부사업 등 총 9개 전략 54개 세부사업으로 구성했다. 사회보장사업 추진 전략은 촘촘하고 안정된 돌봄 기반 확대 빈틈없는 복지서비스 강화 미래 성장을 위한 든든한 지원 안전하고 건강한 생활터전 마련 삶을 즐기는 문화·배움 공동체 구축이다. 균형발전 추진 전략은 시군 사회보장급여 이용 및 제공 기반 구축 시군 역량강화 지역사회 거버넌스 구축 시군 사회보장 인프라 확충이다. 도는 공청회에서 제시된 의견을 지역사회보장계획에 반영해 최종보고회를 연 뒤 도 사회보장위원회 심의와 도의회 보고 등의 과정을 거쳐 보건복지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지역사회보장계획은 지역특성과 욕구에 맞는 사업 추진을 통한 지역사회 문제 완화와 주민 복지 향상 등을 위해 4년마다 수립하고 있다. 도는 기본계획안 마련을 위해 그동안 전담팀 운영, 사회보장 분과별 토론회 등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와 실무자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와 함께 지역사회보장 수요 및 자원 조사, 연수 등을 통해 도내 복지 여건을 진단함으로써 지역 맞춤형 계획안을 수립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김석필 저출산보건복지실장은 “제5기 지역사회보장계획은 앞으로 4년 동안의 도민 복지 향상을 위한 것으로 민관이 협력해 수립 중”이라며 “도민과 전문가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기본계획이 민선 8기 충남의 사회보장정책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